만물단지

<칼럼> 갈등의 원인은 상대가 아니라 바로 나다

dansseam 2007. 3. 17. 01:20

배반은 항상 믿었던 놈에게 당하는 법이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흔히들 “어쩜 그럴 수가 있어?”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과연 어떠한 경우에도 그럴 수 없는 일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차라리 왜 그랬느냐고 묻는 것이 더 대답하기 쉽지 않을까?


직장에서 믿고 따를 수 있는 선배를 만나거나 든든한 후배를 만난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좋은 상사는 훌륭한 지침과 끊임없는 지도로 수많은 오류로부터 당신을 구해주고, 싹수가 파릇한 후배는 잘 성장해 훗날 당신이 별 볼일 없어졌을 때 든든한 그늘을 제공해준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어지는 이 연결 고리는 남들보다 앞서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성장의 토대가 되어준다. 이것을 흔히 ‘라인’이라 말하고 속된말로 ‘빽’, ‘줄’이라 표현되어 빈정거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때때로 썩은 동아줄을 잡은 바람에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기도 하지만 직장에서 잘 만들어놓은 줄은 당신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불의의 사고에 대비해 가입한 종신보험과 같다.


모진 핍박과 견제 속에서 독야청청 홀로 우뚝 서는 것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이야기일 뿐, 현실 세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단순히 라인을 형성하고 파벌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진실한 선배와 든든한 후배를 만들어두는 것이 직장을 다니면서 당신이 해야 할 일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일인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다.


어떤 조직에서든 코드가 맞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그렇다면 좋은 인맥으로 내게 남을 수 있는 후배와 선배는 어떤 사람들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개인마다 다르다. 내가 친해지고 싶다고 해서 친해지는 것도 아니고, 나를 따르라고 해서 후배들이 따라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남에 있어, 혹은 친해지기 위해선 서로 ‘코드’가 맞아야 한다. 이건 그 사람의 성품이나 아량과는 별개의 문제다. 또 개인의 능력과 자질 따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노력한다고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가 나름의 호흡 방식이 있듯, 이 코드 역시 각기 다르다. 그것은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 문화, 습관, 가치관 등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난히 날 이해하는 동료와 주는 것 없이 미운 동료가 있다면, 이건 코드가 맞고 안 맞고의 문제지 그 사람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는 친구 하나 없이 외톨이인 것 같지만 어쩌면 스스로 외톨이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와 유난히 잘 통하는 사람이 있듯, 그와 유난히 잘 통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어떤 회사, 어떤 조직에서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려면, 코드가 맞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그래야 조직생활이 신나고 업무 능률도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조직에서 ‘믿어라, 변치 말자, 틀림없다’란 굳은 결의를 단박에 깨뜨리는 것은 언제나 상황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상황, 타인으로 인해 나까지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 혹은 나로 인해 타인이 피해를 감내해야 할 상황, 즉 누가 책임지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매달 것인가 하는 상황이 책임 소재 문제와 인간적인 배신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지나친 기대치를 낮춰라


매일매일 프로젝트를 위해 생사고락을 함께한 팀원들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팀장부터 말단 사원까지 직장 동료로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선후배 관계로 사이가 좋았다 하더라도 프로젝트의 중대한 실수가 발생하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대부분은 팀장이 최종 책임을 지고 옷을 벗게 되겠지만, 그 중대한 결함이 다른 팀원의 결정적인 실수였다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팀장이 분명히 지시한 내용을 팀원이 수행하지 않아서 일어난 사고였다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팀장이든, 아니면 실수를 저지른 팀원이든, 연대책임을 지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상황에서 서로 살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일 때 생긴다. 서로가 등을 떠미는 상황에서 동료애와 믿음 따위는 사라지고 악의적인 험담에서부터 인간적인 모욕까지, 보지 않아도 짐작되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에게 가장 많이 하는 것이 “네가 어떻게 감히 나한테 이럴 수 있니?”라는 배신감의 표현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아닌 누군가가 내 발등에 도끼 날을 찍어놓고 갔을 때도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흔히들 “어쩜 그럴 수가 있어?”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과연 어떠한 경우에도 그럴 수 없는 일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차라리 왜 그랬느냐고 묻는 것이 더 대답하기 쉽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도덕적·윤리적 가치와는 별개의 개념이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말고와는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사람과 사람 간에 갈등이나 오해, 다툼은 언제나 아주 하찮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적 배신이란 상대방이 보편타당한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행위가 나를 화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가 내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뿐이다.


문제는 상대방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나의 기대치다


직장 동료가 늘 내 볼펜을 허락 없이 쓴다고 치자. 그 동료는 나와 친하기 때문에 굳이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 테고, 나 역시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특정 사건으로 인해 그 친구가 싫어졌다면, 그때부터 그의 행위는 내게 불쾌감을 주기 시작한다.


대뜸, “넌 어쩌면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을 자꾸 집어가니. 이게 어디 한두 번이니!”라고 쏘아붙이게 될 것이다. 이때 그가 명확한 논리와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나를 몰아세웠다고 해서 내가 수긍을 하게 될까? 아니다. 이쯤 되면 논리고 뭐고 없다. 감정이 앞선다. 만약 그의 나이가 적다면 ‘시건방’이 되는 것이고, 나이가 많다면 ‘나잇살이나 처먹어서’가 되는 것이다. 일단 누구든 미운 털이 박히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 짜증난다. 그건 특별히 그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나의 과도한 기대치에 그가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의 선후배 사이이건 동료건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애정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한다. 이것이 문제다. 매일매일 치열한 정글 속에서 살고 있음에도 마음속으로 저 친구는 결코 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 믿음이 굳고 굳어져 어느 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인 양 머릿속에 절대 명제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사소한 일들이 계기가 되어 이러한 환상이 한방에 깨지고 말 것이니 조심하길 바란다.


세상에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살아서 이 세상을 사니까 별별 꼴을 다 보게 되는 것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근거 자료를 챙겨라


인간은 누구나 남에게 인정받고 남들보다 앞서가고 싶어한다. 또한 누구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잘난 인간으로 나서고 싶어한다. 그것은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상황을 탓하기 전에 자신에게 진솔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잘난 인간, 돋보이는 사람이 되는 지름길이다.


남이 아니면 내가 죽어야 하는 약육강식의 비즈니스 정글에선 ‘믿어라, 변치 말자, 틀림없다’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믿고 따르는 선후배와 같이 보조를 맞추되, 혹시 모든 논쟁을 대비할 근거 자료를 미리 챙겨두는 것이 좋다. 세심하고 꼼꼼하게 업무를 확인하는 것만이 당신이 무탈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절대 비책이다.


<마지막에 웃는 2등의 원칙>

1.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서글퍼하지 말고 항상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자.

2. 내 알리바이를 위해 조직에서 회의록이나 불필요한 문서 작성에 목을 매라.

3. 상처받지 않으려면 공과 사를 구분하라.


[박승주 PSI컨설팅커뮤니케이션연구소 실장] 참조 <행복한 2등의 성공법칙> (더난출판.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