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단지

십자군의 처참한 패배, 하틴 전투--퍼온글

dansseam 2009. 10. 8. 01:20

《 십자군의 처참한 패배, 하틴 전투 》

2009.03.26 08:09 | ☆Military★ | 만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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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틴 전투도  오만하기 그지없는 십자군의 처참한 패배
  오랜 세월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 살라흐 앗딘의 치밀한 전술
  예루살렘 왕국의 거의 모든 병력을 깡그리 몰살시킨 참패
  살라 흐 앗딘의 예루살렘 탈환, 제3차 십자군 소집 계기 제공
  하틴 전투도
  하틴 전투는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사막지대로 십자군을 유인해내는데 성공한 살라흐 앗딘의 이슬람군이 이뤄낸 쾌거로 여기에 완벽하게 걸려든 십자군은 여름 사막의 혹독한 더위와 갈증에 온종일 시달린 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슬람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려야 했다.
  이 그림은 당시 하틴 전투를 묘사함에 있어 살라흐 앗딘의 이슬람군을 십자군과 동일한 형태의 갑주로 묘사해 고증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나 당시의 정황을 묘사한 몇 안되는 중요 기록화 중 하나이므로 그런대로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한다.
  
성지 예루살렘을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탈환하는데 성공한 십자군은 이 곳에 예루살렘 왕국을 건국하여 착실하게 내실을 다져나가는 한편( 물론 그 와중에도 영주들간의 알력 다툼은 있었지만 ) 주변 상황은 그렇게 여유롭지가 못했다.
  추가로 유럽에서 증원될 십자군의 육상통로인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는 여전히 셀주크 투르크가 고수하고 있었고( 몇 차례의 돌파 시도는 간단하게 참패로 돌아갔다 ) 1148년 7월 24일, 대군을 동원해 감행한 다마스쿠스 공성은 도리어 약점만 돌출해 이슬람군의 반격을 얻어맞고 패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슬람 세계에게 이 승전은 천하무적을 자랑하는 것 같아 보였던 십자군도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함과 동시에 더 이상 이 지역이 십자군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했다.
  이슬람은 점차 자신감을 회복했고 꾸준히 때를 기다리며 십자군을 중동에서 완전히 몰아낼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다마스쿠스에 위치한 장기와 누레딘의 모스크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십자군을 유럽으로 몰아내기 위한 이슬람 세계의 단결을 추구했던 장기와 누레딘의 모스크
  현재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 위치하고 있다.
  예루살렘을 십자군에게 빼앗긴 치욕을 당했음에도 하나로 단결되지 못했던 이슬람 세계는 점차 장기와 누레딘을 거쳐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에 의해 통일되고 있었다.
  누레딘의 부하인 시르쿠의 조카, 알 말리크 알 나시르 살라흐 앗 딘, 유명한 "살라딘"이 등장한 것이다.
  살라흐 앗 딘은 숙부 시르쿠와 함께 이집트 원정을 통해 실전경험을 축적했고 임종한 숙부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와지르( Wazzir, 재상 )가 되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집트의 재건을 추진했다.
  그는 경영과 건축/토목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 이집트인들을 징집해 군대를 재정비하고 십자군의 공세에 대비해 카이로와 같은 주요 도시에 성을 쌓는 등 방어 태세까지 정비했다.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살라흐 앗 딘은 재정비된 군대를 이끌고 공세에 나서 홍해 연안의 대규모 항구도시들을 대부분 함락시켜 이 방면에 대한 유럽 십자군의 증원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살라흐 앗 딘이 단순히 군사/건축 분야에서만 활약한 것은 또 아니다.
  그는 정치 분야에도 진출해 1171년 09월에는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를 폐위시키고 모든 시아파 교도들의 권력을 박탈했다.
  살라흐 앗 딘의 교통정리로 이집트는 명목상이나마 현재의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에 소재한 수니파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지배하는 형태가 되었다.
  살라흐 앗 딘의 이러한 정책은 큰 결실을 맺었으니 그 동안 시아파와 수니파 등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 세계가 마침내 하나로 통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이후에도 상당한 세월을 평온하게나마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슬람 세계가 단결되지 못한 것이었는데 이제 그것이 깔끔하게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셈
  그러나 예루살렘 왕국에는 불운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보두앵Ⅳ세
살라흐 앗 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현자로 묘사된 보두앵Ⅳ세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로 그는 문둥병 환자에 몸까지 허약하여 정권을 섭정에게 맡길 정도였다.
  그의 사망을 기점으로 예루살렘 왕국은 서서히 내분을 일으키며 붕괴조짐을 보였다.
  살라흐 앗 딘에게 쾌재를 부르게한 사건들은 첫째로 1174년, 예루살렘 왕이 이질로 사망하면서 13세의 보두앵Ⅳ세가 즉위했는데 하필이면 이 보두앵Ⅳ세가 머리는 똑똑했지만 몸이 매우 허약한, 요즘 기준으로 따지자면 "샌님"에 해당된다는 점이었다.
  주위가 온통 기사들로 둘러싸인 예루살렘 왕국에서 왕이 이 지경이면 심각한 수준인데 여기에 더해 보두앵Ⅳ세는 하필이면 나환자, 즉 문둥병을 앓아 항상 가면을 쓰고 다녀야 했고( 이는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 종국에는 목숨까지 잃었다.
  살라흐 앗 딘이 본격적인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한 두번째 사건은 바로 자신의 상관인 시리아의 누레딘이 1174년 05월 14일에 사망한 일이다.
  당시 후계자에 해당되는 누레딘의 아들은 정치라는 것을 수행하기에는 그 나이가 너무 어렸다.
  자연히 시리아는 여러 파벌로 나뉘어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지만 이를 근절시킨 것이 바로 이집트에서 부랴부랴 달려온 살라흐 앗 딘이었다.
  그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다음 "위대한 누레딘의 후계자는 바로 나 살라흐 앗 딘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졸지에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집트와 시리아에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살라흐 앗 딘은 1176년 장기 왕조의 왕족 2명에게 알레포와 모술을 하사해 누레딘계의 지지 기반을 다지는 한편으로 보다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누레딘의 미망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살라흐 앗 딘
살라딘이 축성한 성  오늘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남아있는 살라흐 앗 딘의 동상
  살라흐 앗 딘은 건축/토목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을 발휘해 십자군의 공세에 대비하여 성을 많이 쌓아 방어선을 구축했다.
  좌측 사진의 성은 그 중 일부

  살라흐 앗 딘의 급부상에 예루살렘 왕국은 경악했다.
  이제 이슬람 세계의 통일은 기정 사실화되었고 다음 차례는 바로 자신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라딘은 전임자인 장기와 누레딘과 달리 당장 공세에 나서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데 힘을 쏟았다.
  전쟁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어 무슬림들의 고통이 클 것이기에 막대한 재정적 피해를 감수하며 모든 불합리한 세금들을 폐지하는 한편 건축/토목에 적지 않은 예산을 쏟아부어 모스크와 도서관, 수도원 등을 신축했다.
  살라흐 앗 딘은 신앙심이 매우 깊은 이로 온 이슬람 세계를 알라신의 영도 하에 강력하고 신성한 국가로 탈바꿈하기를 꿈꾸고 있었다.
  살라흐 앗 딘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바하 앗 딘은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카이로에 남아있는 살라딘의 성
 
"지하드( 성전 )로 인해 야기될 고통은 모두 살라흐 앗 딘의 가슴 속에, 그의 온몸 구석구석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그것에 대한 이야기 밖에 하지 않았고 그 외에는 신형 병기와 장비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참전한 이들 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다른 일에 관심을 보이는 이는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예루살렘은 살라흐 앗 딘이 반드시 탈환해야할 장소가 되어버렸고 이 곳에 틀어받힌 기독교인들을 몰아내 유럽으로 쫓아내는 날을 학수고대했다.
  바하 앗 딘의 기록은 계속된다.
  "그렇게 내가 서 있는데 살라흐 앗 딘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 신의 가호로 팔레스타인의 남은 지역을 전부 차지하게 되면 영토를 분할하고 나의 뜻을 전하는 유언장을 작성한 다음 머나먼 프랑크 족의 나라까지 배를 타고 그들을 추격할 생각이다. 그래서 나의 목숨을 걸고 이 지상에서 알라를 믿지 않는 이교도들을 모조리 제거하겠다 ]"오늘날 하틴의 뿔
 
그 동안 예루살렘 왕국의 우군이었던 비잔틴 제국은 다시 한번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를 공격했지만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에게 참패하면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까지 상실해버렸다.
  살라흐 앗 딘은 셀주크 투르크족의 활약으로 이제 예루살렘 왕국의 큰 날개 하나를 잘라버렸다는 점에서 이 승리를 고맙게 여겼다.
  실제로 예루살렘 왕국은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 요청한 지원군 파병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실제로 파병 자체가 불가능했다.
  로마 교황과 롬바르디아 동맹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독일과 전쟁 중이었고( 정말 잘하는 짓이다 ) 프랑스와 영국은 훗날의 백년전쟁만큼은 안되더라도 이미 악화될대로 악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살라흐 앗 딘은 이번에도 공세에 나서지 않았다.
  그로서는 시리아와 이집트 못지 않게 이슬람권 전역에서 세력을 굳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를 보자면 도쿠가와 이에야스 못지 않은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1180년, 살라흐 앗 딘은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를 고수하고 있는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Ⅱ세와 동맹을 맺는 것과 동시에 1183년에는 알레포를 점령했다.
  1185년에 이르러서는 모술과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 왕국 주변의 프랑크인들과는 4년의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왕국을 당황하게 한 것은 바로 동로마 제국의 안드로니쿠스Ⅰ세와 살라흐 앗 딘의 협상이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 왕국은 점차 고립되어 갔다.
  그러는 와중에 예루살렘 왕국 내부에서는 더욱 큰 불씨가 자리잡았으니 바로 보두앵Ⅳ세였다.
  문둥병 환자에 오래 살 가능성조차 없었던 그는 국정을 직접 수행하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연히 왕국 내부에서는 섭정과 그 예하의 지지 세력들간의 내분이 극심화되고 있었고 여기서 부상한 이가 바로 샤티옹의 레날과 뤼지냥의 기( Guy de Lusignan, 아래 초상화 )였다.뤼지냥의 기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지만 샤티옹의 레날은 악당이자 인간 쓰레기라는 점에서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뤼지냥의 기의 과거는 더욱 화려해 주군인 사자심왕 리처드의 대리인을 공격했다가 도리어 푸아투의 영지에서 쫓겨난 인물이다.
  그렇게 방황( 일본으로 따지자면 로닌 )하던 기를 우연히 보두앵Ⅳ세의 여동생인 시빌이 반해 결혼한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기는 문둥병으로 정치를 수행할 수 없는 보두앵Ⅳ세를 대신해 섭정이 되었고 봉토를 하사받아 야파와 아스칼론의 영주가 되었다.
  영화에서 묘사된 것과 달리 기는 상당히 침착한 면모( 과거가 있으니 )를 보였는데 한 예로 1183년 09월, 살라흐 앗 딘이 그간의 침묵을 깨고 요르단강을 도하해 베트셰안을 분탕질치자 기는 신속하게 15,000명의 병력을 소집해 살라흐 앗 딘과 대치 상태에 돌입했다.
  그는 사막전의 특성상 대군인 살라흐 앗 딘의 군대가 장기간 전장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시간을 버는데 주력했고 결국 살라흐 앗 딘은 식수와 식량이 떨어져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와는 너무 대조적이지 않은가?
  오히려 영화에서 신중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의연함을 보여줬던 보두앵Ⅳ세가 기를 겁쟁이라고 비하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기는 노골적으로 왕에게 충성하지 않게 되었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기가 훗날 하틴의 대패를 당하게 되는 계기는 바로 1185년 03월, 문둥병과 싸워온 보두앵Ⅳ세의 서거였다.
  후사는 나이 어린 조카인 보두앵Ⅴ세가 지명되었지만 그는 너무나도 어렸다.
  결국 섭정과 기사들은 여동생인 시빌을 지목하는데 여기서 장애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뤼지냥의 기였다.
  베트셰안의 대치는 전략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섭정과 기사들은 기를 겁쟁이라고 비하했고 시빌에게 여왕이 되고 싶으면 뤼지냥의 기와 이혼하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킹덤 오브 헤븐
십자군 기사  시빌은 이미 기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얻은 상태였고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영화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 기와의 이혼을 하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섭정과 기사들은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여왕이 재혼상대를 직접 고를 수 있었다는 점
  시빌은 여왕의 자리에 오르기가 무섭게 자신은 기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섭정과 기사들의 의표를 찔렀다.
  여왕의 지지가 워낙 절대적인지라 섭정과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기를 왕으로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부작용도 있었으니 기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에 티베리아스의 레몽은 곧장 영지로 돌아가 살라흐 앗 딘과 동맹을 맺어버린 것이다.
  살라흐 앗 딘은 점점 내분을 일으키는 예루살렘 왕국의 추태에 박수를 보내며 레몽에게 기와 맞서 싸울 병력과 물자를 제공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위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바로 샤티옹의 레날과 기의 대립이었다.
  샤티옹의 레날은 자신의 영지인 트란스요르단으로 귀환해 독립을 선언했고 가신들의 주머니를 부풀려 줄 겸 시리아 - 이집트를 왕복하는 이슬람 상단을 습격하기 시작했다.케락에 남아있는 살라흐 앗 딘의 동상
  이는 과거 4년의 휴전협정을 맺었던 살라흐 앗 딘에게 휴전협정을 깨버릴 좋은 구실이었고 어떻게든 살라흐 앗 딘과의 전쟁을 피하려한 기는( 영화와 너무 대조적 ) 1187년 레날에게 약탈한 물품을 전부 반환할 것을 지시했지만 이미 독립을 선언한 레날에게 있어 그것은 웃기지 마쇼! 정도의 헛소리에 불과했다.
  이제 때를 기다려온 살라흐 앗 딘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케락에 남아있는 살라흐 앗 딘의 동상과 당시 이슬람군의 갑옷과 복장을 알 수 있는 일러스트
  상황은 완벽하게 역전되어 과거 십자군이 이슬람 세계를 공격하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살라딘의 이집트 - 시리아군이 예루살렘을 비롯한 각 도시의 십자군을 유럽으로 몰아내기 위한 역공세에 나선 것이다.
  눈앞에 닥친 거대한 폭풍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티베리아스의 레몽은 살라딘과의 동맹을 종식하고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달려왔다.이슬람 전사들
  살라흐 앗 딘은 오랜 세월동안 무슬림들을 살찌우고 군사를 양성하면서 끈기있게 기다린 끝에 전쟁에 나선만큼 대단히 여유로웠지만 그 기간동안 자중지란을 일으킨 십자군은 정반대였다.
  일단 예루살렘 왕국은 부랴부랴 중장 기사 1,200명을 포함한 20,000명의 병력을 집결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살라흐 앗 딘의 선봉은 30,000명에 달했고 그 중 절반은 경기병이라 기동력에서 십자군을 압도했다.
  하지만 병력에서는 열세여도 기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1183년, 베트셰안에서의 효과적인 대치전으로 살라흐 앗 딘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고 실제 나사렛에서의 대치는 명백한 기의 승리였다.
  당황한 살라흐 앗 딘은 최악의 계절인 여름이 닥치기 전에 십자군을 격멸해야 했고 결국 기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회군하여 레몽의 영지인 티베리아스를 공격했다.
  애시당초 중과부적이었던 성병들은 결국 도심의 성벽을 내주고 본성으로 들어가 레몽의 부인 에시바의 지휘 하에 농성전을 전개했지만 언제 함락이 될 지 모를 일이었다.
자중지란을 벌이는 예루살렘
  살라흐 앗 딘이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는 동안 예루살렘 왕국 내부에서는 자중지란이 심화되고 있었다.
폭염 속에서의 전진
  여름의 폭염은 진격하는 십자군에게 최대의 적이었고 살라흐 앗 딘은 느긋하게 이들이 자신들의 덫으로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십자군 기사  자연 십자군 내부에서는 티베리아스를 구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기의 효과적인 전략을 이해한 레몽은 도리어 이에 반대했다.
  그는 기와 차츰 동일한 생각을 가지면서 나사렛에서 티베리아스로 가자면 건조하고 황량한 사막지대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 곳을 여름에 이동하자면 대량의 식수가 필요한데다 조금만 지체하더라도 묵직한 갑옷과 병장기로 무장한 병사들이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탁월한 것이었고 기 역시 이에 동의했다.
  그런데 그날 밤, 성전 기사단장인 리드포르의 제라르가 기를 방문해 레몽은 살라딘과 동맹을 맺었던 배신자이며 그의 첩자가 분명하다며 그를 꼬득였고 결국 기는 이튿날 아침 진격을 명령했다.
  십자군이 진군한다는 소식에 살라흐 앗 딘은 뛸듯이 기뻐했고 곧 증원병력까지 끌어모아 십자군을 열렬히 환영할 덫을 놓았다.
  때는 6월에서 7월로 넘어가는 시점, 그야말로 폭염의 진수를 보여주는 최악의 조건이었다.하틴 전투
  작열하는 태양광 아래 십자군은 갈릴리 호수 서부의 사막을 천천히 걸어갔지만 물도 다 바닥이 나면서 급격하게 갈증에 시달렸고 이런 상황에서 전투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07월 03일, 마침내 운명의 날이 다가온 것이다.
  살라흐 앗 딘은 치밀하게 이들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야음을 틈타 하틴 인근의 건조한 고지대에서 십자군과 조우했다.
  기는 피로와 갈증에 허덕이는 기사와 병사들에게 진영을 설치할 것을 지시했지만 목이 타들어가는 상황에서 제대로 작업하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반면 완벽하게 덫에 걸려든 십자군을 바라보는 이슬람군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후세인들에게 하틴 전투로 불리게 되는 이 처참한 패배는 이미 시작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이슬람군은 십자군 진영을 완전히 포위하면서 그들에게 조소와 경멸이 섞인 어투로 비꼬기 시작했고 안 그래도 갈증에 허덕이는 십자군에게 사우나탕과 같은 열기를 선사해줄 목적으로 진영을 에워싸고 불까지 지피기 시작했다.
  불길은 삽시간에 크게 번져 십자군 진영은 밤새 열기와 연기로 가득차 병사들의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었다.
  날이 밝아오자 십자군은 마지막 일전을 시작했다.하틴 전투
  하틴 전투는 시작부터 패배가 결정된 전투였다.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고 대기한 이슬람군을 상대로 십자군이 덤벼든다는 것은 처음부터 계란으로 바위치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게 타버린 들판에는 밤새 전열을 가다듬은 살라흐 앗 딘의 이집트 - 시리아군이 완벽한 살육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전투는 초반부터 일방적으로 이슬람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이미 갈증에 허덕여 제대로 기운조차 낼 수 없는 십자군이었으니 중무장을 했어도 소용이 없었고 수세에 몰린 십자군은 하틴의 뿔로 불리는 사화산으로 퇴각해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대부분의 병력이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하틴 전투에서의 성전 기사단
  너무나도 완벽한 패배였고 레몽과 몇몇 기사들만이 간신히 이 지옥의 포위망을 뚫고 퇴각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전부 생포되거나 전사했다.
  그야말로 중동판 스탈린그라드 전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참패였다.
  기와 성전 기사단장 제라르, 그리고 몇몇 영주들이 포로로 잡혔고 이들은 정중하게 대우를받았지만 이슬람 상단을 기습한 샤티옹의 레날은 예외였다.
  복수심에 불탄 살라흐 앗 딘은 직접 샤티옹의 레날의 수급을 취했고, 진격을 주장한 성전 기사단 포로들 역시 전원 처형당했다.
  여기에 몸값을 지불할 수 없는 수천명의 병사들이 노예 시장에 팔렸다.
  하지만 살라흐 앗 딘은 대승에 못지 않게 중요한 전리품을 하나 획득했는데 바로 예수의 십자가였다.
  승리의 상징이나 마찬기지인 이 중요한 전리품을 살라흐 앗 딘은 부하들에게 거꾸로 들고 다마스쿠스 거리를 순회하도록 지시했다.
  이로써 하틴 전투는 종료되었다.
  십자군의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였던 하틴 전투로 인해 예루살렘 왕국은 가지고 있던 모든 예비 병력을 손실했고 이 한판의 전투로 공격은 물론 방어할 병력 전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살라흐 앗 딘은 이제 몇 안되는 수비대만이 지키는 도시들을 탈환하는데 주력했고 그 결과 7월 10일 아크레, 9월 4일 아스칼론, 10월 2일에는 예루살렘이 탈환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감격에 젖었다.
  그가 다짐했던 성지 탈환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이블랭의 발리앙과 협상 끝에 살라흐 앗 딘은 몸값을 지불한 기독교계 주민들의 안전한 탈출을 허락했다.
  또한 성내의 많은 교회들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한편 모스크의 재건을 서둘렀다.
하틴 전투
하틴 전투
  하틴 전투의 참패는 곧 예루살렘 왕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사자심왕 리처드를 중심으로 한 십자군 원정이 재개되었지만 이 역시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하면서
십자군은 이후 다시는 예루살렘에 자신들의 깃발을 꽂지 못하게 되었다.
  성전 기사단의 본부로 운용되던 알 아크사는 다시 모스크로 돌아왔고 성내의 모든 십자가들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리하여 1187년, 중동은 다시금 이슬람이 주도하는 형국으로 탈바꿈했다.
  하틴 전투는 순간의 결정이 엄청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지휘관의 굳건한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워준 중요한 전사의 사례가 되겠다.
킹덤 오브 헤븐의 예루살렘
  참고 문헌 :
 
토마스. F. 매든 저 '십자군'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십자군 - 성전탈환의 시나리오"